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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군


함께하는 군민 살맛나는 영동

영동 군민과 함께 살맛나는 영동을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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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 백일 산제곡(百日 山祭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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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한리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구한말인 19세기 말, 물한리 槐峴(괴재, 기재) 마을에 사는 金아무개라는 사람이 금광맥(金鑛脈)을 찾기 위하여 물한리 한 골짜기에서 백일동안 산제(山祭)의 치성을 드렸다. 그 결과, 金아무개는 결국 금광맥을 찾기는 했으나 이를 채굴(採掘)하지도 못한체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그래서 너무 원통한 나머지 운명할 적에 “백일 산제곡 내 금줄이야”라는 탄식을 하며 운명했는데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이 산제를 드린 골짜기에 이런 이름이 남았다 한다.(영동군지, 1991년)
  • Q 말미산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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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해리에 있는 말미산에는 흔히 듣는 바 한을 품고 죽은 아기장수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이 마을에 한 부부가 있어, 어린애를 낳고 보니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있었다. 평소 겨드랑이에 날개가 난 아이는 자라서 역적이 된다는 말을 들어온 부부는 이 사실을 알고, 당황하다가 결국 아이가 잠이 든 사이 날개를 칼로 도려냈고, 이 때문에 아이는 부모를 원망하며 죽고 말았다. 그때 아이는 죽어가면서 “내가 죽은 뒤에 시신을 묻을 때는 생콩 세 되를 함께 묻어 주세요”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는데, 부모들은 죽은 아이를 묻으면서 말한 그대로 해줬다가는 또 다른 화근이 생길지 모른다며 볶은 콩 세 되를 무덤속에 뿌려 주었다. 그런데 묘를 쓴 뒤, 며칠이 지나자 갑자기 어디선가 龍馬(용마)가 나타나더니 아기장수 무덤가에 와서 좌우로 내달으며 힝힝거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를 얼마간 계속하던 용마는 그만 지쳐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이때 만약 아기장수의 부모가 생콩을 묻어 줬더라면 콩이 불어 그 힘으로 무덤이 갈라지고, 죽은 장수가 재생할 수 잇었을 거라고 한다. 그리고 용마는 장수의 재생을 고대하며 무덤가에서 기다린 것이라고 한다. 아이의 부모는 애통해 하면서 다시 용마까지 정성스레 묻어 말무덤을 만들어 주었고, 이로부터 말이 묻힌 산을 말미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영동군지, 영동향토지)
  • Q 선화터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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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도대리의 선화터 고개는 험준한 산을 좌우에 두고 있어, 지금은 길이 잘 포장되어 그렇지가 않지만 예전에는 대낮에도 산적들이 길을 가로막고 나올 듯한 으스스한 고개였다. 실상 가까운 곳에 있는 삼도봉(三道峰)의 험한 줄기에서 도적들의 출몰이 빈번했던 만큼 예로부터 이 길을 지나는 나그네들은 그 같은 불안을 안고 다녔던게 사실로, 산적뿐만 아니라 골 깊은 산중에서 당장 산짐승들이 나타나 행인들을 괴롭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산 길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은 어느 길이 두려운 길이고 또 어느 길이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지 소문을 자주 듣게 마련이어서 관아(官衙) 출입이 잦은 사람이거나 등짐장수ㆍ봇짐장수들도 행로(行路)가 편한 상도대의 고개를 즐겨 찾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험한 이 고개를 넘는 사람은 신선(神仙)이 되어 넘는다 해서 어느 사이에 고개 이름이 선화터로 되었다고 한다(충청북도 전설지)
  • Q 닭재의 떠내려 온 산(鷄城 獨山-계성 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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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드실(柳谷)앞 논 한가운데에는 닭재(鷄城)라는, 지금은 없어진 마을자리가 있고, 그 밑에 돌뫼라는 홀로 떨어진 바위산이 있어 그 평평한 정상에는 고반대(高槃臺)가 있는데 이 독산(獨山)에는 짤막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아주 먼 옛날 어느땐가 극심한 홍수가 무려 9년간이나 계속된 적이 있었다. 이때 이 마을에는 난데없는 산이 하나 홍수에 떠밀려 내려 왔고, 그것이 바로 이 돌뫼인데 이웃 고을에 있는 절에서 떠내려 온 산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산이 떠 내려 온 뒤부터 문제가 생겼는데 그것은 윗 고을 원님이 우리 고장으로 떠내려 온 산의 세금을 받아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를 계속하던 중, 어느 해인가 황간에 새 원님이 부임했는데, 그 원님은 예년처럼 이웃고을에서 세금을 받으러 오자 억울한 생각으로 한가지 묘책을 생각해 냈다. 더 이상 세금을 내지 못하겠으니 산을 도로 옮겨 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었고, 결국 이 말 한마디에 그만 이웃 고을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물러 가고 말았으며, 그때부터 이웃 고을에 더 이상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영동군지, 1991년)
  • Q 雙林寺(쌍림사) 正心(정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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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대리 상림(桑林)마을의 옛 지명은 본래 雙林洞(쌍림동)으로 지금은 없어진 쌍림사라는 고려시대의 큰 절이 있었다. 이 절에는 당시, 매곡면 옥전리에서 태어나 쌍림사에서 출가(出家) 불경에 통달하여 고려말 왕으로부터 登계大師(등계대사)의 호를 받은 뒤, 모든 승려들에게 종사(宗師)로 존경을 받은 正心(정심)이라는 큰 스님이 살았는데 조선 태종(太宗)이 闢佛(벽불, 불교를 배척함)정책을 할 때,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스님은 스스로 종사에서 물러나 보든 불경을 궤짝 속에 넣고, 담벼락에 감춰 바른 뒤에도 계속 쌍림동에 머물며 혼자 수행을 했다 하는데 그로부터 30여년 후 지엄(智嚴)이라는 승려가 찾아와 스님에게 가르침을 원하자 스님은 처음에는 굳게 거절하며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智嚴(지엄)이 3년을 그 곳에 머물며 돌아가지 않고 시중을 들며 가르침을 원하자 智嚴(지엄)의 참된 마음을 안 스님이 마침내 담벼락을 허물어 불경을 꺼내 가르치니 智嚴(지엄) 또한 큰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초에 탄압을 받은 불교가 흔적조차 없어 질 뻔한 위기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전하여 지는 것은 正心(정심)스님에게 깨우침을 받은 덕이라고 하니 스님이야말로 큰스님이었다 할 것이다.(황계지)
  • Q 견훤(甄萱)의 탄생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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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王建) 궁예(弓裔)와 함께 후삼국(後三國)을 다툰 후백제왕 견훤(甄萱)의 탄생에 얽힌 설화는 사실 여러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경북 문경 가은면의 이야기다. 일연(一然)스님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견훤이 광주(光州)태생이라고 쓰여 있기는 하지만 그곳 문경 가은면에는 천마산 농바위 전설, 아차동의 전설, 가은면 갈전2리 아차마을의 전설 등, 견훤의 탄생과 관한 전설이 여러 가지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상주 가은현(加恩縣)태생이라고 기록되었듯이 견훤이 상주에서 출생한 것이 정설처럼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만 같은 이 곳 상촌땅에도 견훤의 탄생설화가 불과 얼마 전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고, 이런 설을 뒷받침할만한 역사적 사실도 있기에 함께 적는다.
    옛날 상촌땅 진들마을(현 유곡2리 진들)에 사는 한 양반 집에 혼기가 다찬 예쁜 규수가 살고 있었다. 이 처녀는 인물도 고왔지만 행실도 바르고 마음씨도 착해서 인근 마을 뭇 청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이 처녀는 어렸을적부터 오줌이 마려우면 집 동쪽 담 모퉁이에 있는 수채구멍(빗물이나 허드레 물을 받아내는 하수구)에 가서 오줌을 누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처녀는 집안에 있을때나 아니면 집밖에 마실을 나가서도 오줌이 마려우면 언제나 집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볼일을 보왔고, 이처럼 10여년을 하루 같이 한 장소에서만 소변을 본 그 처녀는 어느듯 철이 들어 의젓한 처녀가 될 무렵부터는 밤에만 그 곳에서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터인가 처녀의 고운 얼굴에는 까닭 모를 수심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처녀의 부모는 처음에는 예사로 알고 며칠 지나면 괜찮겠지 여겼으나 날이 갈수록 딸의 얼굴에 병색이 짙어지자 마침내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짐작한 부모는 딸을 조용히 불러 놓고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처녀는 결심을 한 듯이 “이미 오래 전부터 왠 낮모르는 총각이 밤마다 제 방에 놀러와서 새벽에 돌아가곤 했는데 도저히 정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사모하게 되어 결국 동침까지 하였으며 그런 일이 계속되자 배가 점점 불러와서 걱정이 되어 점점 불안해 지는 마음으로 잠도 못이루었습니다. 아버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라며 자초지종을 고했다. 이런 딸의 고백을 듣고 난 부모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되담을 수는 없었다. 대신 그 총각의 정체를 밝혀서 자기 딸과 혼인을 시키기로 결심한 부모는 궁리 끝에 딸에게 그 총각이 밤에 찾아 왔다가 새벽에 돌아갈 때, 바늘에 실을 꿰어 옷섶에 꽂아 두도록 당부를 했고, 처녀는 그날밤에도 어김없이 자기 방에 찾아온 총각이 옷에 바늘을 꽂아두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은 뒤 딸의 방 뒷문에서부터 뻗어 나와 서쪽으로 이어진 기와를 얹은 토담 위를 넘어간 실을 발견한 부모가 그 실을 따라가보자, 그 실은 마침 반쯤 무너진 토담너머 수북히 쌓여 있는 나뭇단 속으로 들어 가 있었다. 처녀의 부모는 급히 머슴을 불러 나뭇단을 허물도록 했다. 그리고 그 곳을 다 허물고 나니 땅 바닥에는 큰 구멍이 나 있었고, 실은 그 구멍속으로 들어가 깊은 굴속으로 이어져 있어서 머슴은 긴장하면서 그 실을 따라 굴을 파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굴을 파들어 가다보니 마침내 그 끝부분까지 도달할 수 있었으나 놀랍게도 그곳에는 커다란 뱀처럼 생긴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깜짝 놀란 머슴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끝까지 다 파헤치자 그 곳에는 뱀이 아닌 커다란 지렁이가 몸뚱이에 실꿰인 바늘이 꽂인 채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지렁이는 죽고 말았으나 처녀의 배는 점점 불러오고 있었고, 그로부터 열달이 지나자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 났으니 이 아이가 곧 견훤(甄萱)이었던 것이다. 처녀의 부모는 이처럼 기막힌 일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고민 끝에 딸에게 약간의 땅을 떼어주며 아이와 함께 먼 곳으로 옮겨가 따로 살게 한 뒤, 이 사실을 황간의 원님께 낱낱이 고하며 이 아이의 장래를 위하여 성을 지어 주기를 간청했다. 원님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묘책이 떠 오른 듯, 무릎을 치며 실이 서쪽(西) 토담(土)의 기와(瓦)를 타고 넘었으니 성(姓)을 견(甄)으로 하라고 했고, 그 후 무럭무럭 자란 그 아이는 결국 영웅이 되어 마침내 후백제의 왕이 되었다. 이렇게 생긴 성씨가 황간견씨(黃澗甄氏)라고 하며, 견훤을 때로는 진훤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지렁이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말이 있어 견훤이 출생한 그곳을 진들(進坪)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다.(영동 향토연구, 2001. 11호 박우상, 송문영) 이처럼 견훤의 탄생에 얽힌 지렁이의 설화는 여러 곳에서 전해지고 있고, 바로 옆의 매곡면 내동(內洞, 안골)마을에도 견훤의 탄생설화가 있다고 하지만 상촌의 이야기와 유사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그러나 내동에는 지금은 이 곳 주위에서 모두 자취를 감췄지만 조선 중엽까지 황간을 본관(本貫)으로 삼는 황간견씨(黃澗甄氏)가 거주했다는 사실이 이곳 지리지(地理志)인 黃溪誌 등에 기록되어 있어 이 지역에서의 견훤탄생에 얽힌 전설을 그냥 지나칠 수 만은 없는 것이다.(內洞, 在赤良之下, 古爲甄姓所居, 今爲朴姓所居..... 聽籟亭, 在梧谷川邊, 溪山淸奇, 縣人甄胤世亭也....) 사실 옛 황간현을 본관으로 삼는 토성(土姓,)인 황간견씨가 이 지역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사연을 자세히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황간견씨 이후 내동에 터를 잡은 朴址(박지, 충주박씨)가 그곳에 오래전부터 대대로 살아오던 參軍 甄季達(참군 견계달)의 무남독녀와 혼인, 贅居(췌거, 당시의 풍습으로 남자가 여자집으로 장가들어 처가살이 하는 것)하여 그 집 재산을 물려받아 후손이 번성했다는 충주박씨의 기록에서 그 사실을 유추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Q 베짜는 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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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에서 남서쪽으로 약30km 떨어진 용화면(龍化面) 안정리(雁汀里) 마을 앞 돌산 가운데에 큰 돌이 마주 바라보고 있는 그 중앙에 높이 2.5m의 자연 동굴이 있어 이 굴을 베짜는 굴이라 전해 온다. 시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전란이 일어나자 마을 사람들은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다가 몇 년이 지난 뒤 전란이 아주 끝나서 마을로 다시 돌아 왔다. 그런데 피난살이에서 돌아온 마을 사람들이 이 굴 앞을 지나다가 깜짝 놀랐다. 굴 안에서 베짜는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굴 안에 대고 소리쳤다. 「난리가 끝났오! 이젠 나와도 상관없오.....」 그러자 갑자기 베짜는 소리가 뚝 그치더니 굴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베짜는 소리는 그 날이 기울고 그 다음날에도 여전히 들려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하도 신기하여 등불을 가지고 굴 안을 살피기도 하였다. 몇 사람은 등불을 들고 또 몇 사람은 몽둥이를 들고 굴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랬더니 굴 안에는 짜다 만 베틀이 그대로 놓여 있고 살림을 해 온 흔적이 뚜렷했다. 마을 사람들은 굴 안에서 난을 피해 있는 사람들이 살림도 하고 베도 짜 왔음을 알고 계속 소리쳐 불러 보았다. 「이것 보시오 난리가 끝났으니 어서 나오시오」 그러나 여전히 아무 기척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불을 밝혀 들고 자꾸만 안으로 기어 들어 갔다. 굴 안 깊숙이까지 들어가도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 볼 수가 없었고 굴은 내쳐 끝이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굴을 다 빠져나가 용화면 조동리 앞으로 나왔다. 굴의 길이가 그만큼 길었음을 알 수 있었고 굴 안에서 갑자기 사람의 소리를 들은 피난민들은 겁이 나서 굴 밖으로 도망쳐 버린게 분명하였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이굴은 베짜는 굴로 불려지게 되었고 자연적인 방공호로 난리가 날 때마다 피난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어 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 Q 점치는 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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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에서 서쪽으로 약 7km떨어진 양강면(楊江面) 내만계동(內晩溪洞) 마을 중앙에 높이 10m 둘레가 7m 가량되는 약 700년생 떡갈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이 나무는 나라의 운을 점 치는 신기한 나무로 마을 사람들의 정성어린 보호를 받고 있다. 이 떡갈나무는 진주(晋州) 정씨(鄭氏) 유한(有漢)이라는 사람이 심천에서 이 마을로 이사를 온 뒤에 심었다고 전해오지만 이 떡갈나무가 유명하게 된 것은 나라 운수를 점치면서였다. 1910년 (융희4년) 8월의 일이었다. 한 밤중에 어디선가 짐승의 울음 소리 같기도 한고 산 울음 소리 같기도 한 이상한 울음 소리가 들려 오자 마을 사람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을 한 복판에서 들려오는 그 이상한 울음 소리에 마을의 노인들은 불길한 징조라하여 문을 닫아 걸고 한숨을 내쉬었고 젊은이들은 저마다 몽둥이를 들고 울음 소리의 임자를 찾아 나서 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여름날이었으나 젊은이들과 노인들의 등에서는 소름이 오싹오싹 끼쳤다. 등불을 밝히고 마을 한 복판으로 나온 주민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울음 소리는 바로 떡갈나무 줄기에서 터져 나왔다. 아니 줄기가 아니라 떡갈나무 밑등치에서 솟아 나오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온 나라는 울음 바다가 되었다. 한일합병이 되어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이 빼앗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나라의 불행을 예언했던 떡갈나무는 그 뒤 8·15해방 2년전에도 다시 울었고 6·25동란 3년간을 계속해서 울었다. 나라가 시끄러울 때마다 국운을 점쳐 오는 700년생 거목은 이제 마을 사람들의 보호만이 아니라 이 고을 전체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나무가 되었다.
  • Q 설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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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에서 남쪽으로 약 34km떨어진 상촌면 흥덕리(興德里)를 옛날에는 설보름이라고 불러 왔다는데 여기에는 어느 대사(大師)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수백년 전 이곳의 산과 물을 둘러 보기 위하여 어느 대사가 마을에 들어 왔다고 한다. 대사의 이름이 도선(道詵)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무학(無學)이라고도 하나 그야 어떻든 간에 대사가 이 마을에 들어온 그날부터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여 그 대사는 오도 가도 못하는 몸이 되었다. 대사가 마을에 들어 온 때가 아마 연말 쯤 되었나본데 묵은 해가 기울고 새해가 되어도 눈은 그칠 줄을 몰랐다. 대사는 하는 수 없이 정월 초 하루의 설을 이 마을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둘러 보려던 이 마을의 산수(山水)도 제대로 살펴 보지 못한 채 대사는 꼼짝 없이 이 마을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설 명절이 지나도 눈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기만 하였다. 대사보다 이제는 마을 사람들이 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내 마을에 온 손님이 눈 때문에 발이 묶여 있다니 그것이 마을 사람들의 잘못처럼 생각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르며 제발 눈이 멎어 주기를 빌었다. 마음씨 약한 아낙네들은 눈이 펑 펑 내리 퍼붓는 속에서도 뒤담 밑에 정한수(깨끗한 물)를 떠 놓고 지성을 드리기까지 하였다. 정월 보름이 지나서야 눈은 겨우 멎어서 대사가 움직일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사가 마을을 무사히 벗어 날 수 있도록 눈을 쳐서 길을 터 주었다. 그 뒤부터 대사가 이 마을에서 설과 보름을 묵고 갔다. 하여 마을 이름이 어느 사이에 설보름이 되어 버렸다. 아주 오랫동안 설보름이라 불려오던 마을은 일제때 흥덕리(興德里)로 개칭이(바뀌게)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 Q 미륵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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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에서 남쪽으로 약 31km 떨어진 상촌면 물한리 1리에 바위 형태가 꼭 미륵불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로 인하여 그 산골짜기는 미륵골이라 불려온다. 자연적으로 신비스럽게 생긴 그 돌은 또 어느 때부터인지는 잘 몰라도 아주 신기한 미륵불이라 하여 인근 부녀자들의 아낌을 받아 오고 있는 터이다. 미륵불에 소원 성취를 빌면 어김없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것이며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이 기원을 하면 아들을 낳고, 행운을 기대하는 사람이 행운을 빌면 미륵불은 자기 앞에서 기원하는 사람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그 소원을 들어 준다는 바람에 정월 초순이나 음력 보름 같은 명절에는 소원을 비는 아낙네들이 떡시루와 제사 음식을 차려다 놓고 비는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아낙네들의 소원성취과정을 눈 여겨 보아 오던 마을의 유지들은 미륵불에게 그들의 소원도 말해 보고 싶은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교 학자들이 많이 살던 그 당시 처지로는 들어내 놓고 그들의 소원을 빌어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을 유지들은 이 깊은 산골 마을에 서당이나 번듯하게 한 칸 지어 놓고 후배들을 길러 내었으면 그 이상의 바램이 없었다. 세월이 흐르자 마을 유지들의 바램은 실현이 되었다. 한일합병이후 황간(黃澗)과 매곡(梅谷) 상촌(上村)등지에서 이른바 신교육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는데 그 서너 고을에서 맨 처음으로 신교육 학교가 이 골짜기에 세워지게 되었으니 말하자면 서당을 갖고 싶은 그들의 꿈이 이루어진 셈이었으며 이 소원 성취는 바로 물한1구의 신기한 미륵불의 힘이었다고 전해온다.
  • Q 박인의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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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의 화엄서원(花岩書院)에 모셔 있는 박인(朴忍)은 영동 대성중의 하나인 밀양 박씨로서 이요당(二 堂) 박흥거(朴興居)의 후손이다. 박인은 아버지가 연만하여 항상 아버지 곁에 있기를 희망하였으나 벼슬 길에 나가 있는 몸이라 여의치 못 했다. 효행이 특출하여 만인(萬仁)이라는 벼슬까지 주어졌던 박인이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벼슬 자리를 버린 채 돌아와서 오직 아버지만을 봉양했으며 고기를 잡아다 밥상 위에 올리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그가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에서 살 때 일이었다. 아버지는 충청도 영동에 있을 때 자주 잡아 먹던 붕어 고기가 무척 먹고 싶었으나 이 곳은 영동이 아니라 아들을 따라 서울에 올라와 있는 몸이라 참 붕어 고기를 먹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 눈치를 알아차린 박인은 「아버지가 원하시는 고기인데 어찌 못 잡아 올리겠습니까 오늘 안으로 잡아 오겠습니다.」 하고 강으로 나갔다. 그러나 겨울철이라 강은 꽁꽁 얼어 붙어 있었다. 어느 한 귀퉁이도 얼지 않은 부분이 없어서 도저히 붕어를 잡아 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인은 한 마리의 붕어도 잡아 가지 못하는게 가슴이 아파서 얼어 붙은 강물 위에 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때마침 까마귀의 까치떼 우는 우는 소리에 그는 울음을 그치고 그 곳을 바라 보았다. 한 떼의 까마귀와 까치가 얼음 위에 앉아 자꾸만 소리를 내어 울고 있는게 눈에 띄어 박인은 그리로 가보았다. 박인이 다가 가니까 까마귀와 까치는 날아가 버리고 그 곳에 붕어 한 마리가 강물 속에서 튀어 올라와 있었다. 박인은 다시금 새로운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처럼 원하던 커다란 붕어가 그의 효심에 감동했음인지 저절로 얼음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눈물겹기도 하였다. 그는 그 붕어를 집으로 가져다 아버지 밥상 위에 올려 놓았다. 박인은 아버지의 여생을 고향에서 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영동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고향에 내려온지 얼마 뒤부터 박인의 아버지는 병석에 눕게 되었다. 늙은 사람이 아프면 어린애처럼 되는가 봅니다. 박인의 아버지는 엉석을 부리며 아들에게 입에 맞는 음식을 요구하고 졸라 대었다. 그 중에서도 박인을 난처하게 만든 것은 북쪽 추운 지방의 바다에서나 잡히는 연어 고기가 먹고 싶다고 아침 저녁으로 조르는 것이었다. 연어를 회로 만들어 먹어 보았으면 당장 죽어도 한이 없겠노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박인은 그물과 낚시를 들고 마을 앞의 냇가로 갔다. 시골 냇가에서 연어가 잡힐리 만무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하늘에 당부하여 고기를 잡아 볼 결심이었다. 냇가에 앉아 탄식을 하자니까 뜻밖에도 그물에 연어가 나타나 아버지를 봉양할 수 있었다. 그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때문이었다. 선조 임진왜란때에 박인의 아버지는 나이가 91세였다. 게다가 병환이 겹쳐 도무지 피난을 떠날 수가 없었다. 왜군들은 민가에 뛰어 들어 노략질을 일삼았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찔러 죽였다. 피난을 갈 수 없었던 박인은 어느날 자기 집으로 들어온 왜군들에게 해를 입었다. 아버지를 끌어 안고 함께 칼에 죽은 박인의 효성은 난리가 끝나자 곧 조정에 알려져서 그는 화암서원(花岩書院)에 모시게 되었다.
  • Q 물한리 옥소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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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동에서 남쪽으로 약30km 떨어진 상촌면 물한리에는 옥소폭포가 있어 예로부터 시인이나 나그네들의 발길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풍치 좋은 삼도봉(三道峰)밑의 물한 골짜기에 자리잡은 작은폭포로써 잡목숲이 무성한 숲속의 바위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은 어찌나 차디차던지 한 여름철에도 들어가 목욕을 할 수 없을정도로 냉하며 그 옛날 용이 살았다는 용소(용이 사는 웅덩이)가 있어 지금도 그용소에 발을 담그면 당장 용의 비늘이 발 끝에와 닿을 것 같아 등골이 오싹해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 물한리의 옥소폭포가 유명해진 것은 기우제(비를 비는 제사)와 인연이 깊은 폭포라는 데에 있다. 어느 해 극심한 가뭄이 들어 고을에서는 기우제를 서두르고 있었다. 매년 높은 산이나 마을 앞의 해 묵은 나무 아래에서 지내던 기우제를 상촌에서는 그 해에 옥소폭포에서 지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면에서 나온 면장이 주민 대표들과 함께 기우제를 지내려고 제단 앞에 나아 가자 갑자기 하늘 한 귀퉁이가 어두워 오더니 비가 후둑후둑 떨어지는게 아닌가 기우제를 지켜보던 주민들이 일제히「비가 오신다」하고 소리쳤다. 과연 하늘에서는 장대같은 소나기가 주룩주룩 내리 퍼부었다. 기우제에 나와 제사를 올리려던 노인은 「용소(龍沼)의 용이 보살펴 주신게야」하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한 일이 있고 나서부터 상촌의 기우제만 지내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고 전해온다.
  • Q 양산가
    A
    영동에서 서쪽으로 약15.5km 떨어진 양산(陽山)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가요중의 하나로 전해진 양산가의 발상지인데 이 노래는 신라 백제의 국경분쟁이 심하던 때의 부산물이라 전해 온다. 서기 655(신라 태종 무열왕2년)에 화랑도의한 사람이었던 김흠운(金歆運)은 일찍부터 화랑의 정신을 몸에 익혀 온 무장이었다. 젊었을 적부터 화랑의 노래에 젖어 살았고 화랑의 정신을 몸에 베어 온 김흠운은 싸움터로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부인은 어명을 받고 싸움터로 떠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떠날줄은 몰랐다. 부인은 왕녀답게 눈물을 보이지 않은채 「부왕 전하의 분부시라 하루 이틀 늦출 수도 없는 일이오나 들리는 말로는 양산 지방이 적 백제나라의 조천성(助川城)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아주 위험한 곳이라 하니 각별 조심하도록 하소서」 하고 당부하였다. 남편은 불안해 하는 부인을 달래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우리 신라의 국경을 어지럽힌다 하나 이 몸이 나가 적을 물리치면 기필코 평화를 되찾을 수 있으니 너무 걱정 마오」. 김흠운(金歆運)은 그날로 말을 몰고 양산으로 향했다. 그는 영동군 싸움을 계속했다. 어느날 밤이었다. 그날 따라 비바람이 몹씨 불고 밖은 암흑같이 어두웠다 김흠운은 이 밤이 지나 다음날 일제히 공격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느 사이에 비바람은 멎고 고요하였다. 그가 막 잠이 들려는 순간 병사의 비명소리가 강쪽에서 들려왔다. 김장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벌써 막사 밖에서는 백제 군사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 왔다. 동녘이 훤해 오는 걸 보니 아침이 멀지 않았다. 백제군은 밤새 신라군의 진영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새벽 잠이 곤하게 든 신라 진영을 급습해온 것이다. 신라군은 크게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백제군은 어지러운 틈을 타서 일제히 공격해 들어 왔다. 김흠운 장군은 말 위에 앉아 창을 쥐고 몰려오는 적을 기다렸다. 이때 한 부하가 뛰어 들었다. 「장군- 장군 적들은 어두움 속에 서일어나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우니 비록 장군이 싸워서 죽는다하더라도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합니다. 장군은 신라의 귀족이며 왕칙 사위이므로 만약 적병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는 이를 자랑으로 말할 것이니 우리는 이를 깊이 부끄러워 할 바입니다.」 김장군은 부하들에게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맡겼거늘 이를 알든 알지 못하든 어찌 명예만 구하리」 하고 말한 뒤 그 자리에 굳굳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부하들은 말고삐를 잡고 뒤로 후퇴할 것을 애원하였다. 그러나 김장군은 듣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칼을 뽑아들고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적과 어울려 몇 명을 쳐 죽이고 그는 전사했다. 이 모양을 지켜보던 몇 명의 부하도 적과 싸워 전사를 했다. 태종 무열왕은 이 말을 듣고 슬퍼 통곡하였으며 김흠운에게 일계급 특진을 시켜 주었다. 신라 사람들은 양산 싸움에서 날아온 이 같은 슬픈 소식을 듣고 양산가를 지어 부르며 그들의 전사를 슬퍼했다. 양산지방에 입으로 전해오는 양산가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모링이 돌아서 양산을 가세 난들 가서 배 잡아타고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잉어가 논다 잉어가 논다 양산 창포장에 잉어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자라가 논다 자라가 논다 양산 백사장에 금자라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장게가 논다 장게가 논다 양산 수풀속에 무구리 장게가 논다.
  • Q 구달용의 효
    A
    영동지방에 널리 퍼져 있는 「고기 안 먹는 효자」는 바로 구달용(具達用)을 말하였다. 달용은 아버지 소철(小哲)의 큰 아들이었는데 아버지가 매일 같이 술에 빠져서 가사를 돌보지 않았으나 그는 조금도 불평없이 아우와 더불어 힘써 일하여 그의 아버지를 봉양했다. 아버지의 술값을 대어 주면서 살림살이까지 맡아 하려니까 이만 저만 어려운게 아니었다. 어느해 보리 흉년 3년에 씨앗마져 팔아서 아버지의 술값을 대어 주자니 일을 조금도 하지 않은 달용으로서는 남의 품팔이며 장사일을 가리지 않고 해가며 끝까지 봉양하였다. 술만 퍼 마시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아침 저녁으로 곡을 하며 성묘길에 오르는 것은 물론이요 고기와 술은 제사 지낼 때에만 쓰고 자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부모 섬기기를 하늘 같이 섬겨 오던 그에게 불행한 일이 닥쳐 오고 말았다. 때마침 마을 근처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 그가 증인으로 붙잡혀 간 적이 있었다. 달용은 심한 고문을 당하여 사경을 헤메게 되었다. 보다못한 간수가 다른 사람 몰래 술과 고기를 가져다 주었으나 달용은 고개를 저었다. 간수가 까닭을 묻자 상중이어서 술과 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달용의 효행에 탄복한 간수는 이같은 사실을 관에 알리어 관에서는 크게 칭송하여 주면서 옥에서 나오자 제사 지내는데 필요한 술과 고기를 내려 주었다고 전한다.
  • Q 말무덤
    A
    영동에서 서쪽으로 약17.5km 떨어진 양산면 가곡리 길가의 논 가운데에 오래된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은 김흠운(金歆運) 장군의 묘로 보는 이도 있지만 양산 고을 사람들은 임진왜란 당시 이 고을 출신의 병장 이의정(李儀精)의 말무덤으로 보는 이가 많다. 임진왜란은 우리 역사상 가장 길고 피해가 많은 전란 이었다. 왜란 기간중 어느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보리는 여물기도 전에 지나가는 걸인들이 훑어 먹고 또 밤중에 도둑질을 해 가니 사람들은 이것을 막으려고 활을 들고 지키는데 도둑을 보면 즉시 쏴 죽인다. 그렇지 않으면 막을도리가 없다하니 실로 한탄할일이로다…」 「서울 근처는 얼마전에 쌀을 가진자를 보기만하면 달려가서 죽이고 약탈하였으나 이제는 혼자 길 가는 사람이 있으면 따라 가서 잡아 먹는다…」 임진왜란은 이처럼 처참한 비극을 이땅에 남기고 지나갔는데 왜란이 아주 치열했을 때 싸움을 승리로 이끌려는 의병들의 고생도 그같은 비극 못지 않게 참혹하였다. 왜란당시 영동 양산 일대에서는 왜군들이 고을을 휩쓸고 지나가자 한시름 놓고 숨어 있던 사람들이 산이나 바위굴 속에서 기어 나왔다. 그러나 다시 왜군들이 들어 온다는 것이었다. 각 지방에서는 의병들이 있는 힘을 다해 싸웠으나 별다른 승산이 없었다. 그때 충청병사 황진을 따라 나선 양산 출신 의병장 이의정(李儀精)은 어릴 때부터 활 잘 쏘고 말 잘 타던 솜씨를 발휘해서 매우 활약이 크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이의정이 참가한 진주성(晋州城)싸움은 날이 갈수록 불리해 갔다. 왜군 5만이 성을 포위하니 진주성은 오래지 않아 왜군 손에 넘어 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미 합천 의병장 김준민 충청병사 황진은 모두 전사하였다. 또 몇 명의 의병과 의병장들은 남강(南江) 푸른 물에 몸을 던져자결하였다. 이때 의병장 이의정은 사랑하는 말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내 어찌 살아서 저들의 못된 발굽 아래 짓밟히겠느냐 그러니 사랑하는 말아 나는 욕된 하늘을 이고 살지 않으려니 너는 살아 고향에 돌아가 내 죽음을 전해다오」 이의정은 진주성이 함락되자 북쪽을 향해 절 네 번을 하고 자결했다. 그의 말은 잠시 주인 시체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서 있다가 이의정이 입었던 옷을 물고 북으로 달렸다. 화살처럼 총알처럼 북으로만 달리던 이의정의 말은 그날 밤에 고향 양산 집에 도착하여 주인의 죽음을 알리고 그만 피를 토한 끝에 죽어 버렸다. 이의정의 죽음을 안 고향 사람들은 그의 사랑하는 말이 물고 온 낡은 옷과 함께 죽은 말을 양산 넓은 벌판 한 모퉁이에 장사 지내니 이 무덤이 오늘까지 전해 오는 말무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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