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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에서 서쪽으로 약 14km쯤 떨어진 학산면 서산리(鋤山里)에는 일년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흘러나오는 바위에 샘이 있는데 이 샘을 소코샘이라 불러온다.
소코샘이란 샘의 이름이 부쳐지게 된 것은 소(牛)코에서 콧물이 나듯 그리 많지 않은 샘물이 그치지 않고 나온다는 데서 생긴 이름이었다.
삼국시대의 일이었다. 이 고장은 오랫동안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싸움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은 날마다 궁녀들과 못된 생활을 되풀이하고 있어 백성들의 원성(불만)이 일고 있었다.
그는 매우 타락하여 여자와 술 마시고 노는 것을 빼고는 하는 일이 없었다. 좌평(벼슬이름) 성충(成忠)은 보다 못해 왕에게 간곡히 정사를 바로 하도록 말씀 올렸으나 왕은 성충(成忠)을 괘씸히 여겨 옥에 가두어 버렸다.
성충의 경우를 지켜보던 대신들은 왕의 처사에 불만을 품었다. 성충은 몸이 쇠약하여 죽게 되었다. 그런 말을 전해 듣고도 왕은 충신을 석방시키려 들지 않았다. 성충은 몸이 쇠약하여 죽게 되었다.
그런 말을 전해 듣고도 왕은 충신을 석방시키려 들지 않았다. 성충은 숨을 걷우기 전에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못하와 한 말씀 더드리고 죽고자 하옵니다. 신하는 항상 정세의 변화를 관찰하옵는데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사옵니다. 모든 군사를 동원시킬 때에는 그 지리를 살펴 군사들을 이끌어야 하며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을 지나지 못하도록 하고 수군(해군)은 금강 하류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며 그 험난한 곳을 방어한 후에 치는 것이 옳겠나이다」하고 글을 썼다.
그러나 의자왕은 성충의 그와 같은 충성 어린 글이 무슨 뜻인지조차 살피지 않았다. 나라 안의 소문은 날이 갈수록 흉악해 졌고 의자왕은 왕의 서자(첩에서 낳은 아들)41명에게 좌평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자기 자신의 향락에만 마음을 쏟아 신하들의 원성이 높았다. 게다가 큰 가뭄이 들어 들판은 씨앗을 뿌리지 못한 땅이 묵어 나자빠져 있는 곳이 많았다.
또 다시 불길한 소문이 서울에 널리 퍼져 나갔다. 그것은 여우들이 떼를 지어 궁안으로 들어 왔다는 소문이었고, 한 마리의 흰 여우는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아 방정을 떨더란 소문도 나돌았다.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새와 교미를 했다는 풍문도 나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자하에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다더라」
「한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生草진)으로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무려 18척이나 된다고 하더라」
「궁중에 있는 고목이 울었는데 사람의 곡소리와 같았다고 한다더라」
「서울 우물물이 모두 핏빛으로 변하고 서해 바닷가에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아무리 먹어도 남을 정도였다더라」
「두꺼비들이 수만 마리 나무 위로 올라가 울고 서울 사람들이 이유 없이 놀라 달아나고, 달아나는 백성을 잡아죽인 사람이 수 백 명이나 된다더라」이보다 더욱 놀라운 풍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개 모양을 한 들 사슴 한 마리가 서쪽 사자하 언덕에 와서 왕궁 쪽을 향해 짖고는 갑자기 간 곳을 모른다더라」
「한 귀신이 궁중으로 들어와서 크게 부르짖기를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 하고는 곧 땅 속으로 들어갔다더라」
의자왕은 이런 소문을 듣고 매우 화가 나서 사람을 시켜 파보게 했다. 이상한 것은 깊이 석자 쯤 되는 땅 속에서 거북이 한 마리가 나왔다.
거북이의 등에는 「백제는 둥근달과 같고 신라는 초생달과 같다」고 쓰여 있었다.
왕은 이를 무당에게 풀어 보도록 했다.
무당의 풀이는
「달이 둥글면 찬 것이고 달이 차면 이그러지고 달이 새로 우면 차지 않은 것이니 앞으로 그 달은 점점 차게 될 것이다.」
라고 풀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백제의 멸망을 말하는 풀이었다. 왕은 그런 풀이를 한 무당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어떤 무당은
「둥근달은 왕성한 것이고 초생달은 쇠약한 것이니 이 뜻은 백제는 흥하고 신라는 망할 것이라」
라고 풀었다.
영문도 모르고 왕은 그 풀이를 듣고 매우 기뻐했으나 바로 큰 싸움이 터지고 말았다.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 침략길에 나섰다.
소정방(蘇定方)의 13만 군사와 김유신(金庾信)의 5만은 삽시간에 쇠약한 백제를 쳐들어갔다. 백제왕은 이 말을 듣고 장군들을 모아 놓고 가장 적당한 방어 방법을 물었다.
좌평(佐平) 의직(義直)은
「당병은 멀리 바다를 건너 왔으므로 물에 익숙치 못한 군사는 배에서 괴로워 할 것이니 그들이 육지에 내려 기운을 돌리지 못 하였을 때 이를 급히 공격하면 뜻대로 될것이옵고 신라군사는 당의 힘만 믿는 까닭으로 우리 백제를 얕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만약 당의 군사가 불리한 입장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하여 감히 싸우지 못할 것이니 먼저 당군과 싸움이 옳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여기 저기서 반대 의견이 나왔다. 이 때에 귀양 간 좌평(佐平) 흥수(興首)에게 왕은 사람을 보내어 의견을 물었다. 흥수는
「당나라 군사는 수가 많고 군사들의 규율이 엄하고 더구나 신라와 합세하여 쳐들어 오므로 만약 넓은 들판에서 맞싸우면 불리하나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우리 나라의 중요한 길목이므로 여기서 한 장수가 창을 휘두르면 만사람도 당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용사를 뽑아 여기서 지키고 있다가 당병들이 백강으로 침입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병으로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엄중히 지키다가 그들의 식량이 다 되고 피로함을 기다려 총공격을 하면 반드시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의견을 전했다.
그러나 이 때에 대신들은 흥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흥수는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있고 왕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의 말은 쓸모가 없는 의견이라는 것이었다.
의자왕은 간신들의 의견에 따르고 충신들의 말은 귀 밖으로 들어 백제 장군 계백(階伯)의 결사대 병사 오천명으로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백제는 갈수록 후퇴하기 시작했다.
라당(羅唐) 연합군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니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도망가고 물밀 듯이 밀려 온 당병 앞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때마침 학산면 서산리(鋤山里) 일대에서 신라군과 싸우던 백제 장수는 조국의 패망 소식을 듣고 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칼을 뽑아 들었다.
백제 장수는 분한 나머지 옆에 있는 바위를 찔러 버렸다. 그러자 바위에서는 물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고 이 물은 마치 소의 코에서 콧물이 나오는 것 같다 하여 소코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