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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군


함께하는 군민 살맛나는 영동

영동 군민과 함께 살맛나는 영동을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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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 영국사와 공민왕
    A
    영동에서 양산쪽으로 악20km 나가면 양산면 서북쪽 지점에 영국사(寧國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는데 이절에는 고려조의 공민왕의 발자취가 서리어 있다. 서기 1361년(공민왕 10년) 11월 원(元)나라의 한산동(漢山童)을 두목으로 하여 일어났던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하기 위해 공민왕은 노국(魯國)의 공주와 대신들을 데리고 피난의 길을 떠났다. 남으로 길을 재촉하던 공민왕은 영동 양산면 지금의 누교리(縷矯里)에 머물게 되었다. 영국사의 그 당시 이름은 국청사(國淸寺)이기 때문에 왕이 부처님 앞에 나가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의 평안을 빌려고 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내린 폭우로 도무지 내를 건너 갈 수가 없었다. 개경(開京)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모두 가슴 아픈 일들 뿐이였다. 성 안의 부녀자와 노인과 어린이들은 다투어 성을 빠져나갔다지만 그나마 피난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홍건적의 무리에 짓밟혀 울부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킨다는 소식이었다. 공민왕이 이곳 양산이 아니라 이천(利川)을 지날 때 이미 홍건적은 개경(開京)을 함락 했고 그 뒤 수개월 동안 사람과 가축을 살해하고 왕궁을 불사르는 등 잔악한 행동이 그칠 사이가 없이 일어 났다고 한다. 때마침 개을 건너 천태산(天台山) 쪽에서 종소리가 울려 왔다. 공민왕은 깜짝놀라 좌우를 돌아 보았다. 「이 부근에 절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저렇게 종소리가 아름다운 절인줄은 몰랐구나」 왕비와 왕자 그리고 대신들은 하나같이 공민왕의 눈치만을 살폈다. 대신 한 사람이 설명 하기를 「저 절은 일찍이 신라 때 원각국사(圓覺國師)께서 세운 절로써 처음에는 만월사(滿月寺)라 하였다가 문종대왕(文宗大王)당시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주지로 온 뒤로 국청사(國淸寺)라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하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공민왕은 눈이 번쩍 띄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문종(文宗)의 아들로 천태종(天台宗)을 일으킨 분이 아닌가 의천(義天)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저 국청사에 올라 국태민안(나라와 백성이 평안함)을 빌어보고 싶었다. 공민왕의 뜻을 알아 채린 대신들은 산에 올라 칡넝쿨을 걷어 오라 일렀다. 그들은 수행원과 인근 마을 주민들이 걷어 온 칡넝쿨을 새끼줄처럼 꼬아서 이를 테면 구름 다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공민왕은 완성된 다리를 밟고 국청사 부처님 앞에 나아갔다. 왕비 왕자 그리고 대신을 데리고 공민왕은 국청사에 올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빌었다. 그래서 국청사는 공민왕이 다녀간 뒤 왕이 나라안 백성들의 편안함을 빌었다하여 편안할 영(寧)자 나라 국(國)자를 써서 (寧國寺)로 고쳐 부르기 시작 하였으며 공민왕이 칡넝쿨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간 마을을 누교리(樓橋里)라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Q 핏골
    A
    영동에서 북쪽으로 약 7km 떨어진 심천면 각계(覺溪) 2구 직동을 핏골이라 불러 오고 있는데 이 핏골은 옛날에 혈곡(血谷)이라 써오던 때도 있어서 이름만으로 전쟁의 흔적을 짚어 알 수 있는 곳이다. 핏골은 금강 상류인 초강(草江)이 가까운 곳에 흐르고 있기도 하려니와 마을이 온통 국방상 중요한 산으로 에워싸여 언듯 보기에도 군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더듬어 알 수 있다. 금강과 인접된 산들을 끼고 오랜 옛날 신라 백제는 충돌이 그칠 날이 없었다. 핏골의 전설은 옥천군의 격전지인 구진베루의 지명 전설과 유사하지만 이 고장 사람들은 백제 성왕(聖王)의 사절지(사절지: 절개를 위해 죽은 땅)를 이 핏골로 이야기해 오고 있어 흥미를 돋구고 있다. 서기 533년(백제 제 25대 성왕10년) 7월의 어느날 밤 생긴 일이었다. 어느날 일관(日官: 임금님께 좋은 일 나쁜일을 전하는 점쟁이)은 숨이 턱에 차서 임금 앞으로 다가왔다. 성왕은 벌써 일관의 얼굴을 보고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했다. 일관은 고개를 들어 동쪽 하늘을 가리켰다. 왕의 옆에는 왕비와 공주가 나와 있었다. 그들은 일관이 가리키는 대로 동쪽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동쪽 하늘에서 별이 비오듯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왕은 급히 일관에게 물었다. 「저것은 무슨 징조인가」 「예, 이곳 웅진(熊津)의 땅 기운이 쇠퇴하여 하늘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중이다」 라고 대답했다. 왕은 그 순간 눈을 감고 실연에 잠겨 있었다. 웅진성(熊津城)의 땅 기운이 쇠퇴하다니 그렇다면 우리 백제는 위태롭게 되었단 말인가...... 문주왕 (文周王) 당시의 위례성(慰禮城)에서 이곳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지 겨우 60년도 아니되어 서울이 쇠 하다니 실로 가슴아픈 일이었다. 성왕의 부왕대(父王代: 왕의 아버지)에는 백성들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9백여 호나 신라로 도망가더니 끝내 백제는 일관의 말대로 쇠하고 말것인가. 3년전에는 고구려에서 기마병 3만명이 백제를 기습해 오는가 하면 인접해 있는 신라 고구려 양국 침략에 대비 해온 백제에서는 국력을 기울여 이를 방어해야 할 어려움이 계속되어 왔다. 더군다나 국내에서는 매년 흉년이 들거나 흉칙한 소문들 뿐이어서 백성들이 하루도 마음 편하게 살 수가 없었다. 얼마 뒤 일관은 또 다시 임금님 앞으로 달려 왔다. 서기 535년 (성왕 12년) 4월의 어느날 밤이었다. 일관의 얼굴을 보니 무엇인가 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관은 또 다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서는 별이 어느 별을 범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화성(火星)이 북두성 반대편에 있는 남두성(南斗城)을 범하였던 것이다. 화성이 나타난 것은 백제 땅에 천재지변이 일어난다는 예보였다. 난리나 천재지변을 미리 예방하려면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새로 정하여 하느님께 국태민안을 비는 길 밖에 없다고 하였다. 성왕은 이 문제를 스스로 정하기가 어려워 일관과 좌평(장관)들에게 물었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새로 지을 것을 건의하였다. 성왕은 이듬 해 봄 도읍을 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부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나라의 병란은 그칠 사이가 없었고 신라와 고구려의 위협은 날로 심해가고 있었다. 마침내 서기 554년(성왕 31년)10월 허약할 대로 허약해진 백제는 나라의 위험을 덜어 보려고 공주를 신라왕의 첩으로 들여 보내기까지 하였다.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왕의 딸을 첩으로 맞은 뒤에도 계속 영토 확장을 계획하였다. 신라왕은 지금의 경주에 새로운 주(州)를 설치하고 김무력(金武力)을 성주(城主)로 임명했다. 백제의 왕은 자신의 계략이 빗나간 것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공주를 적의 국왕의 첩으로 들여 보낸 그 창피한 일을 하고 난 뒤에 신라는 백제의 약점을 이용하기라도 하듯 백제의 국경지대에다 새로운 주를 설치하여 계속 영토 확장을 기도하지 않는가? 백제왕은 신라의 멸시와 굴욕적인 처사에 더 이상 참지를 못하여 왕은 즉시 어명을 내려 신라의 정벌의 길에 올랐다. 날센 기마병50명 병사 3만을 동원하여 왕 자신을 포함한 좌평(장관)급 여섯이 모두 전선으로 달렸다. 백제로서는 국운을 걸고 싸우는 큰싸움이였다. 성왕은 장군 가량을 앞세워 관산성으로 쳐들어 갔다. 이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백제군의 사기가 워낙 강하여 신라는 뒤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신라는 김무력의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백제 신라 두나라는 지금의 옥천 영동 군경계인 금강 상류에서 피나는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전세는 날이 갈수록 백제군에 불리하였다. 성왕 자신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백제군은 신라군의 화살과 휘두르는 창과 칼날 아래 무참하게 죽어갔다. 급기야 성왕은 옥천에서 영동으로 쫒기는 몸이 되었고 여섯의 좌평중 네명도 목숨을 잃는 뒤였다. 백제 성왕은 적이 휘두른 칼날에 끝내 목숨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백제는 이 싸움에서 좌평 네명과 병사이만 구천 육백 명을 잃었으니 금강 일대와 주변의 벌판은 피로 물들어졌을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금강의 푸른 물까지 붉은 피로 물들였던 그 싸움에서 심천면 각계리 직동(稷洞)은 가장 심한 접선지여서 후세 사람들은 그 싸움이 있었던 이래로 핏골이라 불러 왔다고 전한다.
  • Q 추곡의 유래
    A
    영동에서 남쪽으로 약20km 떨어진 황금면(黃金面) 계룡리(溪龍里)의 상표(上表)와 추곡(楸谷) 두 자연 부락 이름은 조선초의 중무학대사와 깊은 인연이 있다고 전해온다.

    상표 마을은 애초에 거표동(去表洞)이라 불리워 왔다고 하는데 이 마을은 본래 황간군 오곡면(梧谷面)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무학은 이름을 자초(自超)라 하여 전국의 풍수지리를 살피기 위해 어느때 이곳 상표 마을을 지나다가 무슨 뜻에 선지 여기에다 표시를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리하여「무학이 지나가다 표시한 곳」이라 해서 거표동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으며 이 거표동이 오늘날의 상표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뒤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상표 마을과 추곡은 황금면 추풍령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오곡면의 오(梧)자에서 木자와 추풍령의 秋자를 합쳐 추곡(楸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상표란 거표동 위에 자리잡은 마을이란 뜻이어서 조선초에 무학대사가 이 곳을 지날 때 표시를 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주민들은 지금도 궁금해 하고 있는 실정이다.
  • Q 방아열녀
    A
    영동 일대에는 예로부터 방아열녀 이야기가 주로 아낙네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고 있다. 멀리 청주에서 시집을 온 양씨 부인은 개서 김씨 김정(김정)의 아내였다.

    베 잘 짜고 방아품 잘 파는 양씨 부인은 영동으로 시집온지 한달도 아니 되어 살림 잘 하기로 소문이 나 버렸는데 그녀가 베를 짜기 위해 베틀 위에 올라 앉으면 그녀의 입에서는 저절로 노래가 흘러 나왔고 그녀는 참으로 행복하였다.

    그러나 양씨 부인의 그 같은 행복은 오래 가지를 않았다. 시집와 얼마되지 않았을 때부터 늘 골골 거리던 김정이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버리거 만 것이다. 남편의 3년상을 치루는 동안에도 그녀의 베품팔이와 방아품팔이는 쉴 사이가 없었다.

    몹시 가난하기만 한 시집인지라 하루를 쉬면 당장 생활에 영향이 왔기 때문이었다. 베품과 방아 품을 팔면서 어려운 시집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이제는 양소사(양소사)로 불리우게 된 그녀는 또한 시부모를 봉양하는 일에도 정성을 다 했다. 남편 없는 집안에서 늙은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를 모시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 양소사의 신상에 또 하나의 불행한 소식이 전해왔다. 그것은 친정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이었다. 양소사는 시부모의 허락을 받고 그날로 친정에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친정 집에 들어서니까 위독하다는 아버지가 먼저 반기며 달려 나오는게 아닌가. 양소사는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편찮다던 아버지가 혈색 좋은 건강한 모습으로 자기를 맞자. 양소사의 마음에도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과연 양소사의 예측데로 친정아버지는 그녀에게 개가 (다시 시집 가는일)를 권하고 나왔다. 아버지의 뜻을 알아버린 양소사는 친정집에 더묵을 필요가 없었다. 친정식구들이 모두 잠이든 깊은밤에 양소사는 몰래 집을 빠져 나왔다.

    「시집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배품과 방아품을 팔아 시부모를 공양하자」

    양소사의 결심은 그녀의 남편의 병사 했을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시집으로 돌아오는 밤길은 어둡고 험난하였다. 그런데 이상한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친정집으로 나서자마자 커다란 호랑이가 눈을 밝히고 앞장서는 것이였다.

    시집에 도착할때까지 호랑이는 양소사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었다. 시집으로 돌아온 그날로 양소사는 그 집 살림을 도맡아 여전히 배품과 방아품을 팔러 다녔다.

    어느덧 양소사의 이름위에 「방아열녀」란 이름이 붙게되었고 이같은 그녀의 효행은 이 고을 관청에 알려져서 그녀의 집은 충신이나 효자들에게 부역(공동으로 하는 일) 이것을 면제하여 주던 당시의 제도의 따라 부역을 하지 않는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 Q 강선대
    A
    영동에서 서쪽으로 약 13km 떨어진 양산면(陽山面) 송호리(松湖里) 앞을 휘 돌아 흐르는 양강 물 속에 우뚝 솟아 있는 한 바위가 있으니 이 아름다운 바위를 강선대(降仙대)라 일러 온다.

    일찍이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이 강선대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시를 남긴 이 대(대)는 오늘날 양산팔경(陽山八景)의 하나로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아 오고 있거니와 강선대란 이름이 그야말로 신비스러운 지상의 낙원이었다.

    하늘에 있는 선녀 모녀는 어느 화창한 초여름날 신비스러운 땅을 내려다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마마마 소녀는 어디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곳에 가서 목욕이나 하고 오렵니다.」

    선녀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하기를

    「보아라 저 아래 아름다운 강물 속에 소나무 우거진 석대가 솟아 있고 그 옆의 강물에 몸을 담그어 보고 싶지 않는냐-」

    선녀는 어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내려다 보았다. 과연 강 속에 우뚝 솟은 3십여척(약10m)되는 석대에 해 묵은 소나무가 그림처럼 솟아 있고 초여름의 강물이 햇살에 비쳐 은비늘처럼일렁이고 있었다.

    선녀는 기쁨의 소리를 지르고 그곳에 내려왔다. 구름을 타고 석대에 내려 온 선녀는 주위 산천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한 동안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었다.

    눈을 뜨고 동쪽을 보니 푸른 잎이 공중에 떠서 푸른 안개가 된 것은 천마산(天摩山)이요, 서쪽을 바라보니 공중에 가득하여 하늘을 가린 것은 묵험산이며 남쪽을 보니 오색이 하늘에 나르는 것은 비봉산(飛鳳山)이오 북쪽을 보니 눈섭같이 눈을 사이에 두고 꿈틀거리는 산은 마니산(魔尼山)이라 언덕과 산이 무르녹은 모습을 그려내어 마치 선녀가 사는 하늘과 비슷한 이 땅의 별천지에 선녀는 그만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선녀는 지금의 저 양산 송호리 강가 모래밭에 옷을 벗어 놓고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이 모양을 강물 속에 있는 용바위가 힐끔 힐끔 훔쳐보고 있다가 어느 사이에 용바위는 선녀의 아름다운 몸매에 그만 넋을 일고 말았다. 용바위는 바위이기는 하였지만 숫용이었다. 이 숫용 바위는 목욕하는 선녀를 보더니 금새 검은 마음이 일었다.

    용바위는 물 속에서 선녀 쪽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옮겨갔다. 한참 정신없이 목욕을 하던 선녀는 물 속에서 무엇이 자기쪽으로 옮겨 오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용의 모양을 한 바위가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선녀는 그만 기겁을 하고 놀라 서둘러 옷을 걸쳐 입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이 바위를 강선대라 부르기 시작했다.
  • Q 용두봉
    A
    영동읍 중심지에서 매천리(梅川里)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산이 있는데 이산 줄기를 용두봉(龍頭峰)이라 불려온다. 지금은 그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읍사무소가 세워져 있고 그 머리 부분에는 충혼탑(忠魂塔)이 서 있으며 허리쯤에는 읍청루(揖淸樓)가 우뚝 솟아 있어 영동읍민들의 공원 구실을 해오고 있는 산이다.

    아득한 옛날에 이 용두봉이 여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금강 하류에 떠 있었다고 한다. 하류에 살고 있었을 때는 물론 산이 아니라 용이었으며 아버지용과 아들 용 두 용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아들용이 아버지용에게 자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아버지의 도움을 떠나 어디론가 멀리 가 자립해 보겠다는 아들용의 결심을 아버지용은 쾌히 승낙해 주었다. 아버지용은 아들용에게 이르기를

    「소백산맥이 갈라지는 충청도 영동 고을삼도봉(三道峰) 아래가 신이 내리신 좋은 자리니 그 곳으로 흘러가서 살아 보아라」

    하고 권했다.

    아들용은 아버지용의 뜻대로 이튿날 강물 줄기를 타고 길을 떠났다. 아들용은 금강의 상류로 상류로 올라가 마침내 소백산맥이 보이는 영동 고을까지 왔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소백산맥이 아래 복스러운 지점에 이를 판이었다.

    그러나 아들용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용이 영동의 중심지에 이르렀을 때 마침 빨래를 하러 나온 아낙네들이 개울에 나와 있다가, 용이 상류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제일 먼저 용을 본 아낙네는 깜짝 놀라 「용이 올라간다. 아!」하고 외쳤다.

    그러자 함께 빨래하러 나온 아낙네들도 그 모양을 보고 일제히 「용이 올라간다. 아!」하고 부르짖었다.

    삼도봉(三道峰)쪽으로 물길을 따라 가면 아들용은 그순간 아낙네들의 방정맞은 소리에 기분이 잡쳐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빨래하던 아낙네들을 두 번째로 놀랐다. 「아니 이번에는 저 용이 산으로 변했다.」하고 부르짖었다.

    용은 영동 고을 남쪽을 가로막아 고을은 순시간에 아주 작은 골짜기가 되어 버렸다. 아낙네들이 아니었던들 소백산맥 삼도봉(三道峰)아래로 용은 올라갔을 것이고 그러면 영동고을은 지금보다 배가 넘은 넓은 고을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세월이 흘러 일 제때 일이었다. 용두봉의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산을 잘라 읍에서 매천리 로 가는 길을 닦으려 할 때였다. 일본 공사 감독의 지시로 바위를 깨뜨리자 아주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곡괭이로 바위를 내리 찍을 때마다 바위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게 아닌가 인부들은 그 모양을 보자 「용의 꼬리에서 피가 나온다.」하고 부르짖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장대 같은 소나기가 내리 퍼붓고 벼락이 땅에 떨어졌다.

    「앗! 일본 감독이 벼락을 맞고 죽어 버렸다.」인부들의 입에서 다시금 놀라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니 일본인 감독은 온 몸에 벼락을 맞고 죽어 있었다.

    제 꼬리를 자른다고 보복을 한 용은 그 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을 맞아 노여움을 거둬들였다. 읍에서 매천리로 가는 길을 뚫어도 용은 노하는 일이 없었고 최근 그 꼬리 부분을 정리하여 읍사무소를 지었는데도 용은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였다. 이제는 영동 읍민들의 놀이터가 되어 그 옛날의 전설을 들려주고 있다.
  • Q 패고정
    A
    영동에서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황간을 거치고 다시 추풍령을 향해 가다보면 길가에 오른편 장병사순절비(張兵使殉節碑)가 서 있었는데 그 일대를 패고정이라 불러오는데 부근에는 최근에 완성을 본 장지현방사(張智賢兵使)사당이 세워져있다. 패고정 장병사순절비가 서 있는 황금면(黃金面) 사부리(沙夫里) 오룡동(五龍洞)은 임진왜란 당시 격전지였다.

    이곳은 충의(忠義)로써 나라를 지킨 영동의 젊은이들이 지울 수 없는 피를 흘리며 죽어간 성역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제3군 흑전장정(黑田長政)은 추풍령을 넘어 황간 영동 양산을 통과하여 전라도 지방의 왜군과 합칠 계획이였다. 왜군은 힘은 커서 돌풍과도 같았다.

    때마침 영동 매천리(梅川里) 출신인 삼괴당(三槐堂) 장지현(長智賢)은 사촌동생 호현(好賢)과 함께의병을 일으켜 북상하는 왜군과 맞써 싸우고있었다. 의병장 장병사는 북진한는 왜군을 필사적으로 제지하려 하였다.

    그때 추풍령과 황간에는 방어사 조경(趙璟)과 젊은 장수 정기용(鄭起龍)이 이끄는의병과 장지현이 이끄는 의병들이 집결하여 흑전장정의 대군을 방어하고 있었다. 장병사가 왜군을 친다는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때리는 격이였으나 장의병장은 모든병사의 죽음을 각오하고 비장한 결의로 방어에 진력했다.

    마침 황간 현감(군수)정현복은 그때의병의 식량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합세하였고 김천쪽에서 왜군이 돌풍처럼 밀고 올라 온다는 소식을 듣고 무기를 가지고 장지현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장지현 병사의 집안은 대대로 충의보국(忠義報國)가훈으로 삼아 내려오는 집이었다.

    죽기를 한하고 싸우는 그의 투지 앞에 왜군의 제 3군은 제자리 걸음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왜병의 흑전은 전략에 능한 자였다. 그자는 계속 그들의 주무기인 조총을 쏘아대면서 사방에서 밀려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적의 진지쪽을 바라보던 의병들은 깜짝 놀랐다.

    이쪽에서 불과 5리 떨어진 곳에서 불길이 솟아 오르는게 아닌가 이 갑작스런 변동에 그렇지 않아도 군사가 쓰러질때마다 겁을 집어먹고 있던 의병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군대가 아닌 의병들은 주로 농촌의 젊은이었으므로 그같은 일에 집착하지 못한 것이 큰 헛점이었다.

    호남 호서에서 온 각 고을의 수령들이 그 불길을 보고 모두 겁을 집어먹고 도망친 것은 물론이었다. 장지현은 홀로 진을 지키며 몇 명 안되는 의병들에게 용기를 주며 싸움을 계속했다 이 때 황간 현감 정선복이 장지현에게 급히 다가왔다.

    정현감은 장지현에게 어서 몸을 피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장지현은 고개를 저었다. 정현감은 그가 가지고 온 정보를 장지현에게 털어 놓았다.

    적이 아군의 뒤쪽에서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다는 정보였다. 이 말을 듣고 오히려 장지현은 정현감에게 몸을 피할 것을 권하였다. 적의 조총은 사방에서 날아들고 앞쪽에서는 불길이 계속 하늘을 녹일 것처럼 타 올랐다. 적의 수는 무려 3만이라는 풍문이었다.

    장지현은 정현감에게 계속 몸을 피할 것을 권하면서「왜적은 대군이요 아군은 소수이니 싸움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은 명백한 일이다.」

    정현감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장지현은 이미 죽기를 결심하고 이 싸움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을 결심이구나 하는 것을 안 정현감은 장지현의 비장한 결심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이 때 장지현의 사촌동생 호현(호현)이 형 앞에 뛰어들었다.

    「형님 이제는 짐이 기울였으니 우리도 함께 몸을 피해 뒷날의 계획을 세웁시다.」그러나 형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호현아 넌 무슨 잠꼬대를 하고 있는 게냐 우리 몸에 흐르는 부모님의 가훈을 생각지도 못하느냐 부모님께서는 항상 "충의보국(忠義報國) 청백전가(淸白傳家)" 여덟글자로 우리 형제들을 훈육 하셨나니 이 마당에 와서 그 같은 가훈을 잊어서야 되겠느냐」

    장지현은 말을 계속했다.

    「비록 충성을 다하여 적을 쳐서 나라 은혜에 보답치는 못할지언정 어찌 의를 버리고 삶을 꾀하여 어버이 가훈을 저버린단 말인가‥ 가자 어서 적지에 뛰어들어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의롭게 죽자」 이같은 형의 그 결의로 호현은 눈물을 흐리며 형을 따랐다.

    그들은 화살을 쏘아 적을 쓰러뜨리고 활이 부러지면 칼을 뽑아 적의 목을 베어 가면서 앞으로 앞으로 전진을 거듭했다. 장지현과 호현 형제는 마침내 적에게 포위되어 장렬한 전사를 하고 말았는데 뒷날 이 고을 사람들은 장병사 형제가 적에게 패하여 죽은 자리를 패고정이라 불러 그 자리에다 패고정순절비를 세워 주었다.

    그리고 그들과 맞써기 위해 흑전의 왜군이 지금 황간면 난곡리(蘭谷里)로 들어온 곳을 「도라니」, 으병들이 피를 토하고 죽은 자리 상촌면 일대를 「핏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여 장지현 순절을 슬퍼하여 고을 사람들이 한숨을 쉬었다고 해서 「한들」이란 지명이 생겨났는데 이 한들은 지금의 황간면 계룡리(溪龍里)이다.

    그 뒤 많은 세월이 흘러 일제 때 일이었다. 패고정이 있는 국도 바로 아래 벼랑으로 지금 철도가 있는데 바로 이 철도 설치 당시의 일인 것이다. 1904년 경부선 가설하기 위하여 일본인 공사 감독이 이 장병사 순절비를 땅속에 묻어 버리려 했었다.

    그러자 일본인 감독이 그 순절비에 손을 대는 순간 그는 갑자기 천벌을 받은 듯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어 버렸다. 그 뒤에도 장병사 순절비는 일본인에게 복수를 했는데 그것은 1940년 경부선 복선 공사도중 역시 일본인 측량 기사가 철로의 위치를 장병사 순절비가 세워진 곳으로 변경 가설하려 했었다.

    이번에도 그 일본인 측량 기사는 장병사의 노여움으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어 버렸다. 이처럼 두 번씩이다. 복수를 한 장병사 순절비는 일본인들도 도리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세워 두었고 오늘날까지 아무 일 없이 국도변에 서서 충의보국의 본보기로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어 오고 있다는 것이다.
  • Q 효자박연
    A
    영동에서 국도를 따라 서북쪽으로 약 이삼십리 나가다 보면 심천면 고당리(高塘里) 양강(楊江)에 이르고 양강을 가로 지른 긴 다리를 건너 ㄱ 자형으로 꺽인 길 바로 오른쪽 산 아래 난계사(蘭溪祠) 사당(祠堂)을 만나게 되는데 이 사당이 우리나라의 악성(樂聖) 박연(朴 )의 유적지중의 하나이다.

    난계 박연은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신라의 우륵(于勒) 과 함께우리나라 우리나라 삼대악성 으로 불리워 지거니와 박연의 탄생지요 묘소가 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위대한 악성(악성)의 일면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어릴 때의 박연은 가야금을 매우 잘 타서 날아가는 새와 짐승들이 그의 곁으로 모여 와서 가야금 연주에 맞추어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이다.

    음악에 천재였던 박연은 어릴 때부터 사람과 짐승의 마음을 하나로 통하게 하여 거의 신인(神人)에 가까웠으며 또 망고의 효자로 높았다. 박연의 어머니가 죽어서 심천면 마곡리에 묘를 쓰고 시묘(묘옆에 움막을 짓고 묘를 짓고 모시는 일) 살이를 하던 때의 일이다.

    소년 박연이 매일 밤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꼬박 밤을 새우다시피 하자 시묘 첫 날밤부터 어디서 나타났는지 호랑이 한 마리가 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어린 박연과 묘를 지켜 주는 것이었다.

    그 이튿날도 또 그 다음 다음 날에도 호랑이는 걸르지 않고 소년 효자를 지켜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호랑이는 밤이 늦도록 묘 앞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박연 소년은 은근히 호랑이의 안부가 궁금 하였다. 움막 옆에서 매일 밤 어린 효자를 지켜주던 고마운 호랑이였으니 기다려 질 법도 하였다.

    호랑이를 기다리기 위해 소년 박연은 새벽녘까지 잠을 한 잠도 이루지 못했다. 소년 박연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밤마다 움막 옆에서 묘와 박연을 지켜주다 그만 몸살이라도 난 것일까 도대체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아주 어디 먼 곳으로 떠나가 버린 건 아닌가 모를 일이었다.

    잠을 설친 소년 박연은 거의 먼 동이 틀 무렵에서야 겨우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런데 소년 박연이 막 잠이 들다 꿈속에 호랑이가 나타나 말하기를

    「상주님‥ 상주님 제발 저를 살려 주옵소서 저는 당제(지금의 길현리)에서 함정에 빠져 바로 죽게 되었습니다. 상주님‥‥」

    소년 박연은 꿈속에서 벌떡 일어났다.

    과연 꿈이었으나 소년은 도무지 호랑이의 애원이 꿈만 같지가 않았다.

    「호랑이가 함정에빠져 눈물로 호소해 왔는데 내가 이러고 있다니‥」

    소년 박연은 어머니의 묘소를 떠나 당제 쪽으로 달렸다. 내를 건너고 언덕을 넘어 당제까지 달려갔을 때 거기에는 놀라운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꺼내 놓고 삥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 박연은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호랑이를 보았다. 틀림없이 어머니 묘소를 지켜주던 호랑이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이미 숨이 진 뒤여서 박연이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소년 박연은 눈물을 흘리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자기와의 관계를 설명해주고 호랑이를 돌려 줄 것을 부탁했다.

    마을 사람들은 박연의 효심과 짐승과의 인연을 귀하게 여겨 호랑이를 넘겨 주었다. 박연 죽은 호랑이를 어머니 묘소 밑으로 매고와 정성을 다해 묻어 주었다.

    박연은 해마다 이 호랑이 무덤에 제사를 지내주어 생시의 고마움을 추모하였는데 박씨 문중에서는 박연 어머니의 묘소에 제사를 지낼 때마다 반드시 호랑이 무덤에도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전해 온다.
  • Q 장수고개
    A
    영동에서 동쪽으로 약 19km 떨어진 용산면 금곡리(金谷里) 이곳의 서북쪽으로 험한 산이 있는데 이 산의 계곡을 따라 보은의 청성면(靑城面) 쪽으로 올라가면 산 아래에서 고개를 넘는 길이가 장장 십여리에 이르는 긴 고개가 나온다.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고개를「장수고개」라 부르기만 수백 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이 고개에서 장수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오랜 옛날부터 이 고개에는 산적들이 자주 나타났다.

    워낙 고개가 길어 십여리에 이르자 영동에서 청성(靑城)으로 청성에서 영동으로 오가는 나그네들은 이 고개를 넘어야 할 일이 무엇보다도 큰 골칫거리였다. 십여리를 지나는 사이에 어느 길목에서는 예외 없이 산적들이 나와 노략질을 해 갔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이 장수고개에 늙은 중이 나타났다. 중은 방랑속에 두어 됫박의 시주 쌀을 넣어 가지고 고개를 넘었지만 그 중은 예외없이 중도에서 산적을 만나게 되었다. 산적들은 그날의 목표량이 시원치 않았던지 중의 방랑속에 든 시주쌀까지 모두 툭툭 털어 갔다.

    중은 청성으로 가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저 나쁜짓을 하는 산적들을 이 고개에서 아주 없애 버리는 수가 없을까」

    고개 아래까지 다 내려간 늙은 중은 산 밑 마을 주막에서 하룻밤을 쉬게 되었다. 주막집은 마침 가까운 마을에 장이 섰던 모양으로 어느 때보다 장꾼들이 많았다. 늙은 중은 풍수지리에도 웬만큼 밝은 사람이어서 자기가 지나온 고개 이야기를 꺼내었다.

    「여보게들 이 청성에서 용산으로 넘어가는 십리 고개 자네들도 넘어 보았지‥」

    늙은 중의 말에 장이 끝나고 주막집에 쉬고 있던 장꾼들은 모두 귀를 기울였다.

    「그 십리 고개 좌우산을 훑어보니 틀림없이 그 고개에서 장수가 나올 지형인데」

    말을 듣던 장꾼들은 깜짝 놀라 모두 늙은 중 곁으로 모여들었다.

    「어디에서 장수가 나오겠습니까 스님」하고 한 장꾼이 궁금해서 물었다.

    그러자 늙은 중은 고개를 저었다.

    「그야 나도 모르지 아무튼 십리 고개에는 틀림없이 장차 장수가 나올 징조가 보이네」

    이튿날 늙은 중은 또 어디론가 길을 떠났다. 그날부터 장꾼들은 이 장에서 저 장으로 옮겨 다니며 십리고개가「장수날 고개」임을 떠벌이고 다녔다. 장수가 나오면 먼저 그 고개에서 나그네를 상대로 악한 짓을 일삼아 오던 산적때부터 모조리 죽여 버린다는 이야기도 퍼졌다.

    그때부터 십리고개에서 차츰 산적들의 모습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죽음을 두려워한 그들은 아주 산 아래로 내려가 새 사람이 되었거나 먼 곳으로 떠나 버리거나 했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지관(묘자리 잡는 사람)들이 이 고개에 자주 나타나 묘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장수가 태어날 묘자리가 있다는 바람에 지관들은 다투어 이 고개를 찾았고 그 지관들이 영동쪽에서 혹은 보은 쪽에서 그치지 않고 고개를 넘나들자 이 십리고개는 어느 사이에 이름이 장수고개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Q 활골
    A
    영동에서 남쪽으로 약 26km쯤 떨어진 상촌면 궁촌리(弓村里) 는 활골이란 마을 이름을 지니고 있는 것 처럼 활을 쏘았던 고장임을 알 수 있다.

    활이란 글을 하는 선비들이나 지위가 높은 양반들이 놀기 위해 쏘며 즐겼던 것이 사실이였다.

    옛날 이 궁촌리(弓村里) 활골 터는 고려말까지 훌륭한 선비나 신하들이 고을의 관리들과 함께 활을 쏘며 시를 읊으며 즐겨 놀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지금도 그 자취를 더듬을 수 있는 사정대(射亭坮) 뒷 쪽으로 성조곡(聖朝谷) 이라 부르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 일대는 오랜 전의 관청 자리였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더듬을 길이 없다.

    단지 관청터가 자리했었다는 북쪽으로 그리 가파르지 않은 마미산(馬尾山) 이 뻗혀 있고 남쪽으로 월금산(月琴山) 이 뻗어 있어 조선시대 이전에는 이 곳이 높은 사람들의 놀이터로 애용되어 왔다는 소문이 아직도 이어 내려오고 있는 실정이다.

    아득한 옛날의 일이었다. 고려시대까지 상류인사와 여자들의 놀이터이였던 이 일대는 또한 선녀들의 무도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선녀들은 하늘 나라에서 내려와 마미산과 월금산을 무대로 춤을 추었다. 선녀들의 춤은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긴 때는 수십일 동안을 계속하여 춤 놀이를 계속했다는 것이다.

    그 옛날 선녀들의 무도장이던 이 활골 일대에서 뒷날 젊은 남녀들의 활놀이와 춤놀이로 연일 소리가 그치지 않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인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Q 천인대
    A
    영동에서 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매곡면 용촌리(龍村里) 그 곳에서도 황학산(黃鶴山) 정상 까지는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데 그 황학산에는 천인대라 불리우는 작은 성터가 있는데, 이 성터에는 일본이 누리나라 전역을 짓밟았던 380여년 전 임진왜란 때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부산포를 함락한 일본군은 그야말로 계속해서 북상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이일대에 살고 있던 충주 박씨 집안에서는 난을 피하기 의해여 연일 불안한 가족회의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난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던 때라 쉽게 방안이 떠 오르지 않았다.

    한편에서는 젊은이들을 모아 일본군과 맞서싸워 마을과 선조 사당(祠堂)을 지키자는 주장이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잠시 마을과 사당을 버리고 높은 산에올라 그들의 피해를 피하자는 주장이었다.

    싸움에 경험이 없던 그들은 일단 산에 올라 난의 결과를 살피기로 하였다. 충주 박씨 집안에서 산을 택하자 인근 마을에서도 전부 그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리하여 어린이와 노인을 합친 피난민의 수는 자그만치 몇 천 명에 이르렀다.

    일단 황학산을 피난지로 정한 그들은 싸움의 상황을 수시로 점검 하면서 일본군이 북진해 오는 것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마다 모드 참혹한 그들의 만행뿐이였다. 그리고 싸움터에서 날아오는 소문을 종합해보면 일본군인들은 장소를 자리지 않고 여자를 살상하고 청년을 잡아다 죽이거나 그들의 노예로 부린다고 하였다.

    충주 박씨들은 며칠간 궁리 끝에 그들의 가족을 지키고 마을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황학산에다 튼튼한 성을 쌓아 방패를 삼고 밀려오는 왜적과 싸우는 길이었다.

    그날부터 피난민들은 한 몸이 되어 돌을 옮겨 성을 쌓기 시작했다. 어린이와 노인을 제외한 피난민의 수는 일천명에 이르렀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피난민들은 돌을 운반하여 성을 쌓았다. 성이 완성될 무렵 왜놈은 마침내 황학산 근처에 나다났다. 성안의 일천여 명의 남녀는 가까이 접근해 오는 왜적을 맞아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다.

    그 고장 지리에 어둡고 계속되는 싸움에 지쳐있던 왜적을 내어 쫓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성위 탈환을 포기한 왜적은 산 아래로 후퇴해 버렸다. 그러한 일이 있고부터 이 성은 일천명위 피란민이 쌓았다. 하여 천인성(千人城)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Q 소코샘
    A
    영동에서 서쪽으로 약 14km쯤 떨어진 학산면 서산리(鋤山里)에는 일년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흘러나오는 바위에 샘이 있는데 이 샘을 소코샘이라 불러온다.

    소코샘이란 샘의 이름이 부쳐지게 된 것은 소(牛)코에서 콧물이 나듯 그리 많지 않은 샘물이 그치지 않고 나온다는 데서 생긴 이름이었다.

    삼국시대의 일이었다. 이 고장은 오랫동안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싸움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은 날마다 궁녀들과 못된 생활을 되풀이하고 있어 백성들의 원성(불만)이 일고 있었다.

    그는 매우 타락하여 여자와 술 마시고 노는 것을 빼고는 하는 일이 없었다. 좌평(벼슬이름) 성충(成忠)은 보다 못해 왕에게 간곡히 정사를 바로 하도록 말씀 올렸으나 왕은 성충(成忠)을 괘씸히 여겨 옥에 가두어 버렸다.

    성충의 경우를 지켜보던 대신들은 왕의 처사에 불만을 품었다. 성충은 몸이 쇠약하여 죽게 되었다. 그런 말을 전해 듣고도 왕은 충신을 석방시키려 들지 않았다. 성충은 몸이 쇠약하여 죽게 되었다.

    그런 말을 전해 듣고도 왕은 충신을 석방시키려 들지 않았다. 성충은 숨을 걷우기 전에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못하와 한 말씀 더드리고 죽고자 하옵니다. 신하는 항상 정세의 변화를 관찰하옵는데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사옵니다. 모든 군사를 동원시킬 때에는 그 지리를 살펴 군사들을 이끌어야 하며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을 지나지 못하도록 하고 수군(해군)은 금강 하류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며 그 험난한 곳을 방어한 후에 치는 것이 옳겠나이다」하고 글을 썼다.

    그러나 의자왕은 성충의 그와 같은 충성 어린 글이 무슨 뜻인지조차 살피지 않았다. 나라 안의 소문은 날이 갈수록 흉악해 졌고 의자왕은 왕의 서자(첩에서 낳은 아들)41명에게 좌평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자기 자신의 향락에만 마음을 쏟아 신하들의 원성이 높았다. 게다가 큰 가뭄이 들어 들판은 씨앗을 뿌리지 못한 땅이 묵어 나자빠져 있는 곳이 많았다.

    또 다시 불길한 소문이 서울에 널리 퍼져 나갔다. 그것은 여우들이 떼를 지어 궁안으로 들어 왔다는 소문이었고, 한 마리의 흰 여우는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아 방정을 떨더란 소문도 나돌았다.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새와 교미를 했다는 풍문도 나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자하에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다더라」

    「한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生草진)으로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무려 18척이나 된다고 하더라」

    「궁중에 있는 고목이 울었는데 사람의 곡소리와 같았다고 한다더라」

    「서울 우물물이 모두 핏빛으로 변하고 서해 바닷가에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아무리 먹어도 남을 정도였다더라」

    「두꺼비들이 수만 마리 나무 위로 올라가 울고 서울 사람들이 이유 없이 놀라 달아나고, 달아나는 백성을 잡아죽인 사람이 수 백 명이나 된다더라」이보다 더욱 놀라운 풍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개 모양을 한 들 사슴 한 마리가 서쪽 사자하 언덕에 와서 왕궁 쪽을 향해 짖고는 갑자기 간 곳을 모른다더라」

    「한 귀신이 궁중으로 들어와서 크게 부르짖기를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 하고는 곧 땅 속으로 들어갔다더라」

    의자왕은 이런 소문을 듣고 매우 화가 나서 사람을 시켜 파보게 했다. 이상한 것은 깊이 석자 쯤 되는 땅 속에서 거북이 한 마리가 나왔다.

    거북이의 등에는 「백제는 둥근달과 같고 신라는 초생달과 같다」고 쓰여 있었다.

    왕은 이를 무당에게 풀어 보도록 했다.

    무당의 풀이는

    「달이 둥글면 찬 것이고 달이 차면 이그러지고 달이 새로 우면 차지 않은 것이니 앞으로 그 달은 점점 차게 될 것이다.」

    라고 풀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백제의 멸망을 말하는 풀이었다. 왕은 그런 풀이를 한 무당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어떤 무당은

    「둥근달은 왕성한 것이고 초생달은 쇠약한 것이니 이 뜻은 백제는 흥하고 신라는 망할 것이라」

    라고 풀었다.

    영문도 모르고 왕은 그 풀이를 듣고 매우 기뻐했으나 바로 큰 싸움이 터지고 말았다.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 침략길에 나섰다.

    소정방(蘇定方)의 13만 군사와 김유신(金庾信)의 5만은 삽시간에 쇠약한 백제를 쳐들어갔다. 백제왕은 이 말을 듣고 장군들을 모아 놓고 가장 적당한 방어 방법을 물었다.

    좌평(佐平) 의직(義直)은

    「당병은 멀리 바다를 건너 왔으므로 물에 익숙치 못한 군사는 배에서 괴로워 할 것이니 그들이 육지에 내려 기운을 돌리지 못 하였을 때 이를 급히 공격하면 뜻대로 될것이옵고 신라군사는 당의 힘만 믿는 까닭으로 우리 백제를 얕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만약 당의 군사가 불리한 입장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하여 감히 싸우지 못할 것이니 먼저 당군과 싸움이 옳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여기 저기서 반대 의견이 나왔다. 이 때에 귀양 간 좌평(佐平) 흥수(興首)에게 왕은 사람을 보내어 의견을 물었다. 흥수는

    「당나라 군사는 수가 많고 군사들의 규율이 엄하고 더구나 신라와 합세하여 쳐들어 오므로 만약 넓은 들판에서 맞싸우면 불리하나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우리 나라의 중요한 길목이므로 여기서 한 장수가 창을 휘두르면 만사람도 당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용사를 뽑아 여기서 지키고 있다가 당병들이 백강으로 침입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병으로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엄중히 지키다가 그들의 식량이 다 되고 피로함을 기다려 총공격을 하면 반드시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의견을 전했다.

    그러나 이 때에 대신들은 흥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흥수는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있고 왕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의 말은 쓸모가 없는 의견이라는 것이었다.

    의자왕은 간신들의 의견에 따르고 충신들의 말은 귀 밖으로 들어 백제 장군 계백(階伯)의 결사대 병사 오천명으로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백제는 갈수록 후퇴하기 시작했다.

    라당(羅唐) 연합군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니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도망가고 물밀 듯이 밀려 온 당병 앞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때마침 학산면 서산리(鋤山里) 일대에서 신라군과 싸우던 백제 장수는 조국의 패망 소식을 듣고 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칼을 뽑아 들었다.

    백제 장수는 분한 나머지 옆에 있는 바위를 찔러 버렸다. 그러자 바위에서는 물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고 이 물은 마치 소의 코에서 콧물이 나오는 것 같다 하여 소코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Q 반고개
    A
    영동에서 남쪽으로 약26km 떨어진 황금면 신안리(新安里)에는 반고개라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방현(芳峴)이라 불러 오기도 고려가 끝내 망하고 이성계의 조선이 세워지면서 서울을 개성에서 한성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반고개는 그때 생긴 이름이었다.

    부산에서 서울인 한성까지 천리가 넘는데 이 반고개는 「한성일천리」의 꼭 절반이 된다고 하여 붙여 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고개란 이름이 생기기 훨씬 전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에는 방현(芳峴)이라 불러지기도 했었다. 집을 나서서 길을 걷는 사람들의 마음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아무리 작은 의미라도 사연이 있는 곳에서는 쉬어서그 사연을 풀어 보기 마련이다.

    부산에서 한성 쪽으로 올라 가는 손님들은 열이면 열 모두 이 반고개에서 일단 걸음을 멈추었다.

    「어허 한성가지 꼭 절반을 왔구먼 아무래도 술 한잔 들지 않을 수 없으리」

    한 나그네가 이렇게 말하면

    「이를 말인가 속담에 시작이 반이란 말도 있는데 반고개에 왔으니 절반도 더 온 셈일세 그려」

    그리하여 나그네들은 그들끼리 주막에 들려 한 잔 술에 인정이 담긴 이야기를 나누며 그날 하루밤을 쉬어가게 되더란 이야기다. 한성 쪽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나그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반고개는 적어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어느 주막거리보다도 활기가 돌았으나 그 고개도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경부천리를 달리기 시작하면서 차츰 시들어 졌다고 전해 온다.
  • Q 어서실
    A
    영동읍의 어서실은 작곡산성(昨谷山城) 부근에 있는 한 골짜기에 불과한데 여기에는 삼국시대 국경분쟁이 자주 일어나던 때 한 군주와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산성을 중심으로 한 신라 백제의 싸움은 연일 그칠 사이 없이 일어났다.

    그런데 어찌 된셈인지 날이 갈수록 신라군은 백제군에게 쫓기는 입장이 되었다. 작곡산성(昨谷山城)을 맡고 있는 신라장군은 서울로 사람을 보내어 왕의 독려를 요청했다. 날이 갈수록 군사의 사기가 시들어 가는 신라군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길은 그 길밖에 없었다.

    왕은 곧 서울을 떠나 국경지대로 향했다. 왕이 작곡산성의 신라군을 독려하기 위하여 서울을 출발했다는 소문은 인근 산성에도 알려졌다.

    인근 산성을 맡아 싸우던 장군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에게 청을 넣었다. 기왕에 서울을 떠나 국경으로 나오신 왕이시니 이 번에 우리 산성에도 들러 장병들을 위문해 달라는 청이었다.

    왕은 참으로 난처하였다. 국경지대를 빼어 놓지 않고 모조리 살피시고 돌아다니는 일은 무엇보다도 왕이 해야 할 일이었으나 그렇게 되면 서울의 나라 살림은 누가 맡아서 한단 말인가.

    처음 서울을 출발할 때보다 왕의 발걸음은 바빴다. 신라왕이 작곡산성 일대 신라백제 양군의 격전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인근 산성에서도 치열한 양국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왕은 잠시 앉았다. 간 자리를 어좌실(御座室)이라 불었다. 이 어좌실은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차츰 그 음이 바뀌어 어서실 혹은 어제실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Q 용당리
    A
    영동에서 북쪽으로 약 12km 떨어진 심천면 용당리(龍塘里)10번지 즉 용소골(龍沼) 윗쪽에는 한 500여 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이 마을은 처음 성이 호씨인 사람이 자리를 잡고 다섯 가구를 이루고 살았다는데 마을이 형성 된지 수십 년이 지나자 또 박씨들이 옮겨와서 일곱 가구를 이루며 살게 되었다.

    얼마의 세월이 흐른 뒤 이 마을에서 북쪽으로1.5km떨어진 용소(龍沼)에서 놀라운 한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용소란 금강의 줄기인 송천강변(松川江邊)의 용당리와 서금리(西今里)의 경계에 자리잡은 깊은 강물 속에 있는 용의 굴을 말하는데 이 굴은 명주실 한 꾸리가 모두 풀리도록 들어가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치 길고 긴 굴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강의 절벽에서부터 들어가던 이 용의 굴에는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무기가 살고 있다는 말이 마을에 퍼지면서 이 곳에서는 여름에 목욕도 제대로 못하였으며 사람들은 가까이 가는 것조차 두려웠던 곳이었다.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용소골과 용심이는 국사봉(國師峰)을 사이에 두고 땅 속으로 물길이 통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용심에서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호씨 집안의 한 아낙네가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 들로 나가는데 때아닌 안개가 골짜기에 가득히 퍼져 있었다.

    아낙네가 바로 앞을 알아보기 어려운 안개 저 쪽을 건너다보는데 아주 놀라운 사태가 벌어졌다. 돌연 안개 속에서 커다란 괴물이 안개를 헤치면서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아낙네는 평소에 듣던 이무기 생각이 나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말 이무기는 이무기가 아니라 거대한 용의 모습을 한 괴물이 점점 하늘위로 날아올랐다. 아낙네는 너무 놀라,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를 질렀다.

    「용이 올라간다아…」

    「용이 하늘로 올라 간다아…」

    하고 외쳤다.

    그러자 또 다시 놀라운 사태가 벌어졌다. 멀리 하늘로 오르던 용이 갑자기 땅을 흔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땅위에 떨어져 내렸다. 하늘로 완전히 올라가야 용이 되는데 끝까지 오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 괴물은 옛날처럼 다시 이무기가 되었다. 이무기는 용소골로 땅속을 통하여 용심이로 되돌아갔다.

    그러한 전설이 있어 지금의 용소골이라는 지명이 생겼는데 요즈음에도 용소골 일대에서는 해묵은 기왓장과 집터의 흔적이 나타나기도 하며 어느 때는 그 옛날 이 마을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 쓰던 사기 그릇의 조각이 발견되어 그 옛날의 전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요즈음 사람들은 이무기 살고 있다는 용심이를 용굴로 부르고 있으며 마을의 이름인 용당리도 말하자면 용의 전설에서 유래된 것이라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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